먼저, 열 세 살 적 이야기로 시작하겠다. 나는 열 세 살에 어떤 경험을 통해 이미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을 깨우친 기억이 있다. 마음 먹기에 따라서 약간의 과장을 덧대어 충분히 굉장한 스토리로 만들어 버릴 수도 있지만, 그런 것은 내 성격과 맞지 않으므로, 그냥 간단하게 있는 그대로 이야기하겠다. 그 전까지는, 난 굉장히 긴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 아이였다. 긴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특징 중의 하나가 대단히 소심하고 집요하다는 것인데, 나는 그 특징을 빼면 남다를 곳이 없는 아이일 정도로 증상이 심했다. 모두들 알다시피, 그런 증상이 심각한 아이를 - 그것도 여자아이를 - 좋아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내 경험상으로는, 백 퍼센트 없다. 시대를 불문하고 긴 언어 사용자들은 호감도가 낮다. 역시 짧은 언어 사용자의 유쾌함과 간결함이 더욱 환영을 받기 쉽고, 긴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 사람들은 다가가기 힘든 류의 사람으로 인식 되기 십상이다. 어린 시절의 나는 한 때 사람들에게 인기 있는 아이이고 싶었던 적도 있었으므로, 나의 언어가 길고 지루하다는 사실에 깊이 상처받기도 했었다. 바로 그 상처가 지독하게 깊은 골을 파고 썩어 들어갔던 것이 열 세 살 적 일이다. 열 세 살의 나는, 참으로 고독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현재 스물 아홉 살인 나는 짧은 언어 사용자가 되기 위해 날마다 짧은 명상 호흡법을 통해 수련하고 있기 때문에, 길고 지루한 기억들의 절반 정도를 내 인생에서 소멸해 버린 상태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짧은 언어에 능통해 버린 것은 아니다. 스승님도 말씀하시길, 태생이 긴 호흡을 타고난 자는 절반 이상의 성공을 기대하기는 어렵다고 하셨다. 하지만 절반의 성공에라도 기대어 사는 편이 그렇지 않은 것보다 훨씬 수월하다. 그것이 내가 날마다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는 이유이다. 어쨌거나 당시에 왜 내 곁에 부모님이 안 계셨는지, 왜 이름 모를 타인들과 동거했는지에 대한 기억이 없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므로 그냥 넘어가겠다. 중요한 것은 그로 인해 나는 무척이나 외로웠고, 날마다 슬펐다는 점이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내 주변에는 항상 타인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나쁜 사람인지 좋은 사람인지는 상관 없었다. 그나마 타인의 존재로 인해 간간히 언어의 마침표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타인들의 활약은 악의 없는 명령과 깊이 없는 사교에 기인했다. 전혀 매력적이지 않은 담임 선생님이라던가, 단말마적 짧은 음절만 반복하는 동급생들과 유일하게 즐길 수 있는 유희란, 바로, 마침표 찍기 놀이였다. 만약 그들마저 없었다면 나는 지금쯤 세상에서 가장 긴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으로 기네스북에 올랐을 지도 모른다. 혹자는 그것이 긴 호흡의 달인으로서 충분히 존경 받을 만한 업적이라고 떠들어댈지 모르지만, 나는 그런 인물이 될 생각은 추호도 없었고, 지금도 없다. 개인적으로, 열 세 살은 굉장히 중요한 나이라고 생각한다. 그 시절의 경험은 영혼의 본질을 잡아먹는다. 나는 열 세 살의 어느 날 버스를 탔고, 그 때 그러한 종류의 경험을 했다. 그 날은 운동회가 끝난 뒤라 있는 대로 녹초가 되어 있었다. 하얀 체육복은 흙먼지로 얼룩졌고, 운동화 속에 작은 돌멩이들이 발바닥을 콕콕 찔러댔다. 항상 단정하게 내려놓던 앞머리가 땀 범벅이 되어 흐트러져있고, 손으로 가릴 새도 없이 입을 쩍 벌리고는 연실 하품을 해대고 있었다. 그런 모습으로 버스에 오르던 순간을 생생히 기억한다. 열 세 살의 나는, 제발 버스에 앉을 자리가 있기만을 기도했다. 하지만 물론 자리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더한 선물도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나'였다. 버스 안에는 딱 한 자리만을 남겨두고 모든 자리에 내가 앉아있었다. 손톱 끝에 흙을 파내고 있는 아이, 손거울을 보며 앞머리를 정리하는 아이, 신발 한 짝을 벗어 잔돌을 털어내고 있는 아이, 유행가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는 아이, 창문에 이마를 기대고 졸고 있는 아이 등 정확히 몇 명인지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그들은 모두 <나>였다. 버스에 오른 나는 당연히 놀랐고, 운전기사를 쳐다보았다. 흔히 볼 수 있는 인상의, 그저 무뚝뚝하고 불친절할 뿐인 버스 기사는 귀찮은 듯이 인상을 찌푸리며 타려면 빨리 타, 라고 언성을 높였다. 당황한 나는 그대로 차에 올랐다. 버스는 덜컹, 출발을 하고, 나는 운전석 옆의 손잡이를 잡고 멍하니 서서 한참을 어느 곳에 시선을 둬야 할 지 모르고 식은 땀을 흘리고 있었다. 간간히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보는 나도 있었지만, 그 시선은 하나같이 타인이었다. 말하자면, '나'를 '나'로 인식하고 있는 표정이 아니었다. 무표정한 나도 있었고, 미소를 지어주는 나도 있었지만 그것이 나 자신이라고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것을 알아채는 순간의 거대한 공포를, 무언가 굉장히 끔찍하고 암울한 것이 발목을 낚아채는 듯한 그 기분을, 나는 여전히 가끔씩 악몽을 통해 경험한다. 내가 만약 짧은 언어를 쓰는 아이였다면, 분명 그 순간에 와락 울어버렸을 것이다. (물론 짧은 언어를 쓰는 아이가 그런 경험을 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그랬다면 그 순간은 단지 일회용 악몽으로 변해버리고, 재치 있는 입담으로 언젠가 한번 술자리에서 내뱉을만한 이야깃거리가 되어버렸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긴 호흡을 타고난 자다. 십육 년이라는 시간에 걸쳐 수련을 한 뒤에야 비로소 이런 식으로나마 털어낼 수 있는 인간인 것이다. 만약 내가 몇 십 년에 걸친 고행을 각오한다면, 나는 어린 시절 내 고독의 이유를 잊어버린 것처럼, 내가 고독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리게 될 지도 모른다. 정말로 그런 날이 온다면 나의 스승님은 그의 생애 가장 자랑할만한 수제자를 두게 되는 셈이다. 여하튼 나는 그 순간의 영원 같은 공포를 참아냈다. 정확히 말하자면 참아냈다는 표현은 적당하지 않지만, 어쨌든 그 순간은 지나가 버렸다. 그러자 내가 보고 있는 타인으로서의 내가 무척이나 친근하게 느껴졌다. 그들은 타인인 동시에 나였다. 그들은 나에게 다정할 권리도 있고 무심할 권리도 있는 나 자신이었다. 골방의 시체처럼 고독할 수 있는 존재이자, 까맣게 우글거리는 개미떼처럼 집합적인 존재였다. 사랑과 그 반대말, 모두를 동시에 긍정할 수 있는 아이들이었다. 버스가 다시 덜컹, 다음 정거장에 정차했다. 다른 손님들이 하나 둘씩 올라탔다. 나는 그들이 비로소 내가 찾은 친근함을 깨뜨리는 것에 불안했지만, 사람들이 버스를 꽉 채울 정도로 몰려와도 그 친근함은 사라질 줄을 몰랐다. 게다가 그 누구도 우리가 모두 똑같이 생긴 아이들이라는 걸 알아채지 못했다. 그 사실이, 날 더욱 안도하게 만들었다. 나는 그 뒤로 짧은 호흡 명상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다른 무엇을 선택했었다고 해도 당시엔 그것이 나의 최선이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바로 그 최선의 선택을 통해서 나는 열 세 살부터 조금씩 고독의 구렁텅이에서 헤어나올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열 세 살 이후로, 나의 긴 언어는 두 번의 그럴듯한 해를 함께하게 된다. 타인을 통해 긴 언어에 힘을 주고 가까스로 마침표를 찍어가던 시기를 거쳐, 스물 세 살과 스물 일곱 살에는 긴 언어에 쉼표를 찍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 물론 <돌이켜보니>라는 수식이 붙기는 한다. 당시에 내가 스스로 행복하다고 느꼈던가? 몇몇 빼어났던 순간 외에 난 역시 항상 불안하고 두려웠다. 지금이 내 인생의 황금기야, 라는 생각 따위는 하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항상 낯선 세상에 뚝 떨어진 듯한 외로움, 잡념으로 가득 찬 불면의 밤, 지표 없는 공허함 등의 사춘기 감정에 시달려야 했으니까. 그건 천성이고, 병이었다. 알다시피 난 긴 언어를 가진 사람으로 태어났고, 노력해서 중화될 수는 있었지만 근본을 바꿀 수는 없었다. 그러니까 지금도 나는 짧은 언어를 이해하는 긴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일 뿐, 내 존재 자체가 짧은 언어를 소유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스물 세 살과 스물 일곱 살 적에는, 긴 언어의 묘미를 나름대로 탐닉하고 있었고, 온갖 잡다한 괴로움의 한복판에서 오히려 자유를 느낄 수 있었다. 그런 거다. 나는 그 때 바로, 자유로웠다. 가난하고 하는 일 없고 쓸데없는 지방덩어리 뇌만 돌리고 감상에 젖어 질퍽거리는 한심이지만, 그래도 중요한 것, 그 때는 자유로웠다는 것. 고독과 자유가 친구가 되면 당신은 누구의 친구도 될 수 있다. 스물 세 살, 스승님께서 말씀하셨다. <타인이 되어 보거라.> 완벽한 이방인. 단 한 명의 지인도 없는 곳으로 떠나라고 하셨다. 언어조차 통하지 않는 미지의 세계로. 신기하게도, 그 말씀이 굉장히 편안하게 느껴졌다. 한마디 대꾸도 없이 그저 눈빛으로 수긍하자, 스승님의 얼굴에 짧은 미소가 스쳤다. <네 발바닥에 고독을 심었다.> 마지막 말씀을 마음과 발바닥에 새기고, 단정히 인사 드린 후, 집으로 돌아와 떠날 채비를 꾸렸다. 그것이 스승님과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북경에 갔다. 난생 처음 외국 땅을 밟고 느꼈던 미열 같은 흥분. 23년간 한번도 고향을 떠나본 적이 없었다. 그 동안 내가 아무리 방황했다고 한들, 나는 철저하게 익숙한 도시에서 보호받고 있었다. 이방인이 된다는 것은 참으로 매력적인 체험이었다. 이방인이 되는 순간부터 나는 내가 누구인지 처음부터 다시 알아나가야 했다.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 공간에서 나를 새로 써나가야 했다. 낯설고, 찌릿찌릿하고, 답답하고, 망설여지고, 흥미진진한 경험이었다. 가끔 터무니없이 생경한 사람들 틈 사이에 서 있노라면 원인 모를 메스꺼움과 현기증에 시달리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는 절대로 당황해서는 안 된다. 호흡을 가다듬고, 무언가 짧은 것을 생각해내야 한다. 민망할 정도로 짧은 것들을 연상하다 보면 어느새 불쾌감은 사라지고, 짓궂은 용기가 슬그머니 제 길이를 늘이는 법이다. 후미지고 복작거리는 멋대가리 없는 숙소를 구하고, 그 곳에서 일년을 보냈다. 숙소 이름은 동왕장. 그 곳엔 전 세계 방방곳곳에서 몰려든 짧은 언어 사용자들이 득실득실했다. 우리는 서로 힐끔거리며 호기심을 교환했고, 마침내 곧잘 어울리게 되었다. 밤마다 맥주를 마시며 어울리고, 서로 경쟁하듯 요리를 했다. 누군가는 기타를 쳤고, 구석구석 다툼도 있었다. 모국어에 상관없이 연애가 시작되고, 취향이 맞는 무리들이 형성됐다. 낮에는 공원에 다니고 밤에는 클럽에 갔다. 지글지글 기름진 양꼬치를 즐겨먹고, 사람들을 모아 한바탕 후오구오 축제를 벌이기도 했다. 제법 매력적인 두 명의 친구도 사귈 수 있었다. 짙게 빛나는 갈색 피부가 매력적인 유카는 언제나 남자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그녀가 사람들에게 던지는 묘한 눈빛은, 마치 길게 잘 뽑아낸 면발처럼 보는 사람을 감탄하게 했다. <길고, 은근하게.> 그녀의 지시에 따라 연습을 해보았지만 제대로 되지 않았다. 언어가 길다고 해서, 눈빛까지 길어지지는 못한다. 참으로 억울한 일이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던 설희는 모든 액션의 창시자였다. 유카와 나는 설희의 행동 반경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어느 날, 셋이 맛없는 찡장로쓰를 먹는 중에, 그녀가 상해에 가보고 싶다고 중얼거렸다. 분명 혼잣말이었던 것 같은데, 정신을 차려보니 상해탄이었다. 우리는 싸구려 불꽃을 흔들어대며 화려한 야경을 향해 돌진했다. 중력에 개의치 않는 설희의 액션이 존재의 가속을 명령했고, 우리는 흔쾌히 박차를 가했다. 상해가 우리 주위를 뱅글뱅글 돌았다. 너무 빨라서, 상해라는 도시가 긴 것인지 짧은 것인지 판단할 수가 없었다. 북경으로 돌아오고 얼마 후, 몇 십 년 만에 한번씩 돌아온다는, 끔찍하게 몽환적인 밤이 찾아왔다. 역시나 재빠르게 설희가 맥주와 돗자리를 챙겨왔다. 유카는 드디어 이케아에서 구입한 램프를 쓸 일이 생겼다며 즐거워했다. 나는 담요를 챙겼다. 동왕장 앞 공터에 다국적 짧은 언어 사용자들이 몰려들었다. 얼마 기다리지 않아, 밤 하늘 가득 무섭게 유성이 쏟아져 내렸다. 뚜욱. 뚜욱. 뚜욱. 빛나는 돌맹이들이 쏜살같이 떨어져 내렸다. 나는 반짝임보다, 추락의 속도에 감탄했다.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우아하게. 슬프게. 쏜살같이 떨어져 버리는 우주의 찌꺼기. <저 돌에 맞아 죽고 싶어.> 설희가 속삭였다. 나는 그녀와 빛나는 돌맹이가 충돌하는 장면을 상상했다. 영혼과 우주가 만물의 법칙을 무시한 채 서로를 향해 쾌속 질주한다. 서로에게 내뿜는 불멸의 살기가 영원의 속도로 업그레이드 된다. 상상만으로도, 장관이었다. 이듬해,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스승님을 찾았지만, 찾을 길이 없었다. 스승님은 말 그대로 감쪽같이 내 인생에서 사라져 버렸다. 복받친 상실감이 내면의 제어 장치를 망가뜨리고, 속도를 오염시켰다. 그리하여 스물 일곱 살까지, 나는 속도의 마력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가까스로 살아냈다. 평상시에는 내가 긴 언어를 타고난 존재라는 사실조차도 의식하지 못했다. 두 번의 연애를 하고, 두 번 이직을 했다. 일주일에 두 번씩 술을 마셨고, 두 달에 한번씩 감기를 앓았다. 그렇게 스물 일곱 살이 되고 보니, 나는 세 번째 연애를 하고 있었고, 세 번째 회사에 다니고 있었다. 그러다가, 우연치 않은 계기로, 제어 장치를 찾게 되었다. 생뚱맞게도, 그것은 그림이었다. 처음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정말이지 대수롭지 않은 영화 한 편 때문이었다. 어느 날 인터넷에서 하루키의 단편 소설 <토니 다키타니>를 영화화 했다는 기사를 보고, 전혀 흥미를 보이지 않는 애인 K를 반강제로 잡아 끌고, 국내 유일 개봉관을 찾아 종로까지 갔다. 하루키 단편집 <렉싱턴의 유령> 중에 <일곱번째 남자> 다음으로 좋아하는 소설이 <토니 다키타니>였다. 어떤 느낌으로 만들었을까, 기대를 심하게 했다. 누구나 그렇지 않을까. 기대가 심하면 어떤 식으로라도 실망을 하게 된다. 심지어는 기대를 전혀 하지 않았던 애인 K까지도 심하게 실망을 했다. 두 사람의 실망이 맞닿으면 실망 게이지는 가속도가 붙어 증폭해 버린다. 나는 못생긴 남자 주인공도 용서하기 싫었고, 옷 못 입는 여자 주인공에는 실소를 퍼부었다. 잘난척하는 하루키 팬의 한 사람으로서, 내 머리 속에 그려놨던 소설의 세계를 다르게 표현한 영화를 신랄하게 비웃어줘야 했다. 밉상이 따로 없었다. 다만. 신기하게도, 영화를 보고 난 후, 토니 다키타니가 그림을 그리는 모습이 계속 마음과 머리를 때렸다. 그 남자는 고독해서 그림을 그렸다. 있는 그대로 똑같이 그리는 것엔 천부적인 소질을 타고났다. 특히 기계처럼 감정을 담지 않고 정교하게 그려낼 수 있는 소재는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집중해서 완성했다. 마음을 담지 않고 몰입하는 것. 그래서 고독한 시간을 견디어 내는 것. 그것이 토니 다키타니가 그림을 그리는 이유였다. 내가 그렇게 고독했던 걸까? 아니. 적어도 현실적으로는 그렇지는 않았다. 태생적으로 긴 언어를 사용한다는 불편함 외에 당시 내가 특별히 고독했어야 할 이유는 없었다. 더군다나 나는 한동안 오염된 속도에 채여 제대로 된 호흡을 해 본지도 오래였다. 하지만 누군가, 엄살이라고 탓하지 않을 테니 마음껏 얘기해봐, 자기 연민이라고 탓하지 않을 테니 마음껏 털어놔봐, 라고 한다면 나는 스물 일곱 살 전에도, 스물 일곱 살에도, 스물 일곱 살 후에도 <나는 고독해!>라고 외쳤을 것이다. 타고난 영혼을 끝까지 부정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망각하는 것은, 나쁘기까지 하다. 하지만 고독의 정도를 떠나서, 마음이 간지러운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무엇인가가, 어떤 확실한 목적을 가지고 간지러움을 태우고 있었다. 간지러움을 참다 못해 까무러칠 듯이 괴로웠다. 내 육신은 자지러지고, 내 영혼은 발작했다. 어이없게도, 이 증세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자 씻은 듯이 사라졌다. 그러나 그림을 그리지 않으면 다시 재발했기 때문에, 회사에 앉아있기도 힘들었다. 결국 사직 사유에 암 투병, 세 글자를 적어 넣고 과감하게 퇴사했다. 고통이 무서워서 두려움이 사라진 셈이다. 그림을 그려본 경험이라고는, 초등학교 때 다녀본 미술 학원 정도, 작은 미술 대회에서 몇 번 수상한 정도밖에 없었다. 어렸을 때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고 칭찬도 제법 들었지만, 어찌된 일인지 스스로 무엇인가를 그려본 적은 없었다. 무작정 일러스트 학원을 등록하고, 무식한 용기로 첫 수업을 들었다. 십 몇 년 만에 해보는 데생이었다. 우습지만 당연하게도, 나는 명암의 기초 부분에서부터 좌절감을 맛보았다. 하지만 좌절감이 아무리 크다 한들, 발작의 고통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고통 받지 않기 위해 그리는 그림은 치열하고 처절하다. 나는 미지의 바다에서 익사하지 않기 위해 바둥거리는 불쌍한 존재였다. 발버둥의 말미에서 숨이 차오르고 더 이상 버틸 수 없겠다 싶던 순간, 나는 본능적으로 혹은 절실하게 짧은 명상 호흡법을 시도했다. 위기를 느낀 육체가 오래 전의 그것을 기억해냈다. 살고자 하는 본능이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서서히, 긴 언어의 감각이 되살아났다. 머지않아 호흡이 자연스러워지자, 그림을 그리지 않는 순간에도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다. 붓을 내려놓고, 방금 그려놓은 파란 새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파란 새가 아주 긴 언어로 충고를 전했다. <존---재---를-----------망---각---한-----------죄> 파란 새에서, 스승님을 느꼈다. 고통이 사라진 후에도, 나는 미친 듯이 그림을 그렸다. 그나마 있던 친구들도 잃었고, 돈은 바닥이 났고, 몸은 삐쩍 말라 볼품이 없었다. 오로지 내가 다시 긴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으로 돌아왔다는 것만이 수확이었다. 내 영혼은 또렷했고 투명했으며, 무엇보다 진품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설희로부터 편지가 왔다. 봉투 속에는 태국으로 가는 비행기 티켓과 함께 짧은 메시지가 들어 있었다. 앙코르와트에 가자. 마법에 걸린 듯, 정신을 차려보니 방콕 공항이었다. 눈 앞의 설희를 보자마자 단박에, 그녀의 때묻지 않은 속도에 감화되어 버렸다. 진심으로 그녀와의 재회를 기뻐하면서 21세기 최악의 버스에 몸을 싣고 캄보디아 국경을 향했다. 앙코르와트. 그 곳에서, 유카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앙코르와트로 가는 길은 멀고도 험했다. 헤드라이트가 망가진 버스가 칠흙 같이 어두운 밤에 비포장도로를 질주했다. 번개가 칠 때마다 옆자리에 앉은 설희의 얼굴이 번쩍였다. 번개는 그녀가 반할 만한 소재다. 분명 감동하는 눈빛이었다. 그 때였다. 차가 푹, 꺼지는 소리가 났다. 이건 그저 웅덩이도 아니겠어, 앞자리의 금발 남자가 불안한 듯 중얼거렸다. 어쩔 수 없이, 밖으로 나가 차를 미는 수밖에 없었다. 빗줄기가 워낙 세서 눈을 뜨고 있기도 힘들었다. 모두가 사력을 다해 버스를 밀었다. 사방의 어둠이 더욱 더 사람들의 공포심을 자극했다. 머리 위로는 끊임없이 번개가 쳤다. 차가운 은빛 번쩍임이 농염해질수록 시소폰의 붉은 땅이 꿈틀거렸다. 검은 구름과 붉은 대지 사이에서 파열된 물방울들이 방전을 꿈꿨다. <이 곳에서 벼락 맞아 죽었으면.> 나는 설희가 이 암흑천지에서 벼락의 제물이 되는 것을 상상하며 웃었다. 그 순간, 얄궂은 번개들을 제치고 위대한 벼락이 저 너머에 강림하셨다. 쫘악, 무엇인가 장렬하게 갈라지는 것이 명도(明度)로 느껴졌다. 사람들이 그 장관을 보고 기겁하는 동안, 나는 설희의 눈이 남몰래 반짝이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죽고 싶어하는 사람이 귀여울 수도 있다는 걸 그 때 처음 알았다. 극도의 피곤 상태로 도착한 시엠립에는 몇 세기에 걸쳐 우리를 기다려 온 앙코르와트와 한 시간 만에 비행기를 타고 캄보디아 국경을 넘은 유카가 있었다. 땀과 비, 먼지 범벅이 된 꼬락서니에 혀를 차며 유카가 말했다. 돌아갈 때는 나와 함께 비행기를 타자. 우리는 반항할 힘도 없어서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유카가 싱긋 웃으며, 예의 면발 같은 눈빛을 뽑아냈다. 숨 죽이고 있던 그리움이 울컥했다. 나답지 않게 눈물이 났다. 그 후 캄보디아에서 어떤 고생을 했는가를 일일이 열거하고 싶지는 않다.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 여행 전반에 깔린 불편함이 없었다면, 아마 앙코르와트에서 느꼈던 감정의 반에 반도 느낄 수 없었을 것이 분명하다. 다만 우리는 유카의 푸념을 감수해야 했다. 그녀의 적은 바퀴벌레만한 모기와 에어컨 없는 2달러짜리 숙소, 그리고 하루에 한번씩 살갗을 벗겨내는 저 위대한 캄보디아의 태양이었다. 우리는 일부러 앙코르와트를 마지막 여행지로 남겨두었다. 시엠립의 구석구석까지 세 번 이상은 들렀다고 생각될 때에야 비로소 앙코르와트로 발걸음을 옮겼다. 앙코르와트의 긴 참배로(參拜路)를 지나면서부터 나는 연신 감동하여 말수가 적어졌고, 설희는 신나서 뛰어다녔고, 유카는 사진을 찍을만한 곳을 찾아 다녔다. 하늘의 무희가 정글 위에서 춤을 추며 시바(Siva)의 분노를 잠재우고 있었다. 익랑과 회랑의 서커스가 펼쳐지고, 거대한 뱀이 요동쳤다. 나는 축제의 환영 속에서 결코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아득함을 느꼈다. 수미산(須彌山) 중심에서 고양된 에너지가 발산되고 있었다. 강한 현기증이 호흡을 앗아갔다. 쉴 곳이 필요했다. 우리는 앙코르와트의 구석진 그늘을 찾아 돌 바닥에서 낮잠을 청했다. 시간이 느껴지지 않았으므로, 얼마나 쉬었는지는 모르겠다. 분명히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필름은 천천히 감겼고 초침이 분침이 되었다. 미풍이 불어오고 나비가 춤을 추는 시간, 귓가에 아스라이 신의 입김이 느껴졌다. 살포시 실눈을 뜨자 오래되어 빛 바랜 햇살이 다가오고, 절대적 무음 속에서 난생 처음 듣는 음악이 피어났다. 진정한 휴식은, 치유다. 부드럽고 커다란 손이 내 마음을 쓰다듬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마침내, 긴 언어에 쉼표를 찍는 느낌이 들었다. 내일 새벽엔 해돋이를 보러 오자. 짧은 낮잠 타임이 끝나고, 모두들 나른한 목소리로 입을 모았다. <돌아갈 때 그냥 버스 타자.> 설희가 중얼거렸다. 아마 우리는 저도 모르게 21세기 최악의 버스에 몸을 싣게 될 것이다. 설희의 속도는 언제나 최고의 타이밍에 맞추어 우리를 싣고 간다. 유카가 길고, 은근한 눈빛을 던졌다. 긍정의 의미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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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잘 쓰시네요.
리플따라 오게 되었는데, 어느새 이 곳, 저 곳 다 둘러보게 되네요.
자주 들르게 될 것 같은데,
괜찮죠?
저도 좋은 음악 들으러 자주 갈께요...
괜찮죠? ^^
왠지 여기서의 썰양은.. 요술공주 밍키같은 느낌인걸.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