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06'에 해당되는 글 1건


  1. 이건 무슨 자세지 (24) 2008/06/13

이건 무슨 자세지
from
習作所 2008/06/13 01:57

사용자 삽입 이미지



우리는 분명 본능적으로 결핍을 지각한다.
자신의 삶에 부족한 무엇을 느끼면, 그것을 탐색하고, 동경하게 되는.

그는 매일 거대한 빌딩 14층 환기도 제대로 되지 않는 복작거리는 사무실에서 하루 최소 8시간씩 꼬박 모니터를 쳐다본다. 현재 그가 그리워하는 것들이란, 바람에 살근살근 흔들리는 들꽃이라던가, 비 온 후 개인 하늘 아래 풀숲, 안개가 자북히 깔린 인적없는 바닷가 같은 풍경들이다.

언제부터일까. 그가 정적인 요가 자세를 바라만 보는 것으로도 위안을 느끼고, 신선한 건강식을 먹으며 내장이 정화되는 기분을 느끼기 시작한 것은. 친구들과 클럽에 가서 칼로리를 소모하고, 푸짐한 안주용 요리를 즐기던 때에 비하면 180도 변화다. 무엇보다도 그는, 외제차와 고층건물로 즐비한 도곡동 거리보다 그 옆 양재천을 더 예뻐하고 있는 자신을 깨닫고는, 흠칫 놀랐다. 늙어가는 건가. 활력과 야망을 잃어가는 걸까. 잠시 두렵기도 했지만 그게 아니라는 걸 알아채기에 오랜 시간은 필요하지 않았다.

그는 자기 연민이나 엄살 따위를 정말 싫어한다. 하지만 자신에게 결핍된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판단하고 대처하는 것은 다른 이야기, 라고 결론 지었다. 만약 이유없이 항상 찌뿌둥하고, 자고나도 개운치 않고, 잔병이 속출하고, 머리가 지끈거리고, 가끔 모니터 앞에서 토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면, 당신 역시 그와 비슷한 무엇이 결핍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 더 늦어버린다면, 마치 구제불능으로 담배 연기에 찌들어버린 방처럼, 환기를 시키거나 벽지를 새로 발라도 그 냄새가 빠지지 않아, 결국은 이사할 수 밖에 없는, 그런 존재가 되어버릴 지도 모른다.

우리는 필요한 것들을 추구하듯이 결핍된 것들을 동경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그는 동경만 하고 있지는 않았다. 늦은 밤 퇴근 후 집에 돌아오면, 조용한 클래식 음악을 들으며 신선한 샐러드를 먹고, 틱낫한의 책을 읽다가 잠이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공원에 가서 조깅을 하고, 막 갈아낸 과일쥬스 한잔을 원샷한 후 출근길에 올랐다. 주말엔 서울 근교 수목원에 가서 산림욕을 즐긴 후, 시간이 된다면 온천에도 들릴 예정이다. (뿐만 아니라, 주 3회 요가 강습 신청 예정, 아로마 마사지 샵 10회 이용권 구입도 예정이다.)

일년 후, 회사의 부도로 그는 실직했고, 정확히 세 달을 쉬었다. 90일의 휴식 끝에 그는 자신에게 무언가가 심각하게 결핍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수트를 '빼입고 아침 일찍 출근해서 회의를 하고, 메신저 3종과 엑셀/파워포인트/워드 3종을 모니터 창에 띄워놓고 씨름하다가, 돼지갈비에 소주 한잔으로 하루를 마무리해주는, 그런 생활이 몹시 그리워졌다. 좀 더 쉴 수도 있었지만, 그는 생각보다 일찍 구직 활동에 임했다.

그는 역시나 자신의 결핍에 적극적이다. 그리고 그런 그의 말에 따르면, 그것은 인간의 본능이며, 현대인은 더더욱 적극적일 필요성이 있다고 한다.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BlogIcon 가별이 2008/06/13 02:25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허벅지가 허리보다 굵어요. ㅎㅎ

    저만큼이나 활동적이라면 걱정할 필요가 별로 없겠는걸요.

  2. 이쁜이 2008/06/13 08:09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자연에 푹 파묻혀서 사는게 좋은 사람도 있지만 전 찾아가는 자연이 더 좋은거 같습니다..
    복작데는 남대문과,롯데도 좋아하니까요...^^

  3. BlogIcon 령주/徐 2008/06/13 10:27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오랫만이군요...라라님의 그림...후훗;;;
    저역시 자연을 그리워하지만 태생이 서울태생이라...또 떠나살수는 없더라고요..흠흠;;

  4. BlogIcon mepay 2008/06/14 01:10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글씨가 왜 이렇게 이쁜거지??
    파폭만 쓰다가 오랜만에 IE로 들어 왔는데..글자가 이렇게 이쁜 줄 처음 알았습니다.
    그림은요..
    그림은 솔직히 어렵습니다..ㅎㅎ;;;

  5. BlogIcon 투모로우 2008/06/15 13:39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글 너무 좋아요...완전 정독했어요.
    정말 팍팍 와닿네요. :)

  6. BlogIcon 자유 2008/06/16 15:36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어느 한 쪽에 치우지지 않는 것이 중요하겠죠. :)
    현대인들이야 너무 문명과 도시에 찌들어 살다보니, 가끔 자연 속으로 걸어들어가도 좋겠어요.

  7. BlogIcon 티그레 2008/06/17 07:29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그림 멋져요. 그림이 주는 느낌이 너무 예쁜것 같아요.
    색감도 좋구요.ㅋㅋ

  8. BlogIcon smilehero 2008/06/17 23:39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글이 느무느무 공감됩니다 :)
    결핍이여, 영원하라. 욕망이여, 영원하라. 내 너를 채워주리니 ~
    그러나, 못채우고야 말겠쬬? ㅋ

  9. BlogIcon 2008/06/18 10:44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잔병이 속출하고, 머리가 지끈거리고, 가끔 모니터 앞에
    서 토할 것 같은 기분이 들며, 상쾌함을 잊어버린.

    지금의 제게 정말 공감되는 글이군요.
    담아갑니다.. ^ ^

  10. BlogIcon Disturbed Angel 2008/06/22 01:11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그림이 점점 좋아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요.
    거꾸로 바라보는 초록빛이 마음에 드는데요~ ^^

    스스로에겐 가혹할 필요, 그리고 스스로를 아낄 수 있는 여유, 이 두가지를 견주면서 내 머릿속에 지금 나는 무엇을 상상하는 것인지를 알지 못하는 것이 바로 제 자신이에요.

  11. BlogIcon castello 2008/06/25 00:33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기린 흉내내기 자세요~. 아하하, 그림자만 본다면 기린 비슷할 거 같기도 해요. 근데 정말 오랜만에 뵙네요. 잘 지내시지요...?

    • BlogIcon 섬연라라 2008/06/25 13:51  address  modify / delete

      그러게요. 저 기린이랑 코끼리 좋아하는데. ㅎㅎ
      안좋을 일이 생겨도 재미있게 이겨내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그래도 가끔씩 맥 빠지는 건 어쩔 수가 없네요.
      아자아자아자!!! ㅋㅋㅋ

  12. BlogIcon 펀펀데이 2008/06/27 16:13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말과 함께 저런 자세를 취하고 있으니 상당히 에로틱하게 보이는데요? ㅋ
    각박한 세상! 정말 휴식이 필요한것 같습니다. 휴~

  13. BlogIcon Mr.번뜩맨 2008/06/27 23:37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정말...라라님의 그림은 사람을 순간 멈칫하게 만드는 독특한 매력을 지닌거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