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 트라비아타>는 제 일생을 통털어 두 번째로 보게 된 오페라입니다. ㅎㅎ
대학 시절, 고전 음악 관련 교양 수업 과제를 위해 생전 처음 <아이다>를 봤었지요. 같은 수업을 듣던 친구와 어리버리 서울에 올라와 어렵사리 예술의 전당을 찾아갔던 기억이 나네요. (그 때 예술의 전당도 첫 방문이었거든요...;;;)
단지 과제를 위해 계획한 오페라 기행이었지만 예술의 전당에 들어서면서부터 이미 저는 흥분을 감출 수가 없었습니다. 당시 저는 얼터너티브 음악이나 비주류 영화의 파도 속에서 "될 대로 될지어다!"를 외치며 방황하는 청춘이었거든요. 아마도 그런 저에게 클래식한 것이 더 신선하게 느껴졌던 것 같습니다.
오페라글래스 조차도 신기해서 이리저리 초점 맞춰보며 장난 치다가, 막이 오르고나서는 저도 모르게 서서히 몰입되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에는, 속 깊은 곳에서 미세한 울림으로 배어나오는 짜릿한 눈물을 느꼈습니다. '이래도 안울어?'라는 식으로 강요하지도 않고, 저의 상황과 동일시되어 도저히 울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내용도 아니고, 어떤 과장된 모션으로 눈물을 호소하지도 않지만, 분명 저와 제 친구는 이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종류의 눈물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그것은 모범적인 속도로 서서히 이야기의 틀을 만들고, 황홀한 음색으로 주제를 전달하고, 화려한 무대로 눈을 빛나게 하면서, 천천히 우리를 정화(淨化)의 단계로 이끌었습니다.
대부분의 오페라 스토리는 현대를 살고있는 우리들에겐 다소 식상한 것일 수 있으나, 그런 단순한 이야기를 끌어나가는 힘은 이미 오랜 시간을 걸쳐 증명되어 온 것입니다. <라 트라비아타> 역시, 우리는 이미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를 통해 어디선가 한번 쯤 들어본 이야기 쯤으로 생각할 수 있는데, 이건 당연한 거겠죠. <귀여운 여인>, <물랑루즈>, <발리에서 생긴 일> 등 수많은 작품들이 <라 트라비아타>의 기본 플롯에 오마쥬를 바쳐왔으니까요.
<라 트라비아타>는 총 4막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스토리를 참고하시려면 아래 +more를.....) 이탈리아 오페라 연출의 거장으로 불리운다는 피에르 루이지 피치는 <라 트라비아타>의 시대적 배경을 2차 세계대전 당시로 바꾸고, 각 장을 화이트, 블루, 레드, 블랙으로 연출하여 모던한 스타일을 추구했습니다. 젊은 사람들 취향을 맞추기 위해 주인공들도 '날씬하고 보시기에 좋은' 님들로 세팅하셨다고 하네요. 실제로 알프레도 역의 남자 배우가 셔츠를 벗는 장면이 나오는데 오페라에서 몸짱을 구경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후우.....
more..
오페라를 보면서 제가 궁금했던 것은, 과연 비올레타가 고급 창녀인가 아니면 그저 문란한 생활을 하던 사교계 인물인가 하는 점입니다. 그런데 어제 우연히 서점에 가서, 조윤선님의 <미술관에서 오페라를 만나다>를 읽어보니 당시에는 고향을 떠나 파리로 올라온 여인들이 잘 풀리는 경우엔-이게 정말 잘 풀린 건 지는 알 수 없지만- 후견인을 얻어 사교계에도 진출하고 사치를 누릴 수 있었다고 하네요. 그리고 오늘 점심을 먹다 나온 이야기인데, 요즘 잘 나가는 상위 10%의 고급 유흥업소를 '텐프로'라고 부르는데, 텐프로에서 일하는 분들은 엄청난 액수의 월급에, 개인 팁에, 후견인(애인)도 두고 있다고 합니다. 물론 소문이니까 정확한지는 모르겠지만, 얼마전 배우 오지호 스캔들을 봐도 어느 정도는 믿을 수 있는 이야기 같기도 하네요. 아무튼, 시대를 막론하고, 아름답고 가난한 여성들은 돈의 유혹에 가장 집요하게 시달리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유혹을 받아들인 여성들은 세상의 도덕적 잣대로부터 결코 자유로울수 없겠죠.
알프레도의 아버지는 비올레타를 찾아와, 알프레도의 여동생이 결혼을 해야하는데 알프레도이 비올레타와 도주하여 은거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파혼 당할 수 있다면서, 그녀에게 떠나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녀는 자신이 과거를 청산하고 오직 순수한 사랑의 힘으로 새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알프레도의 부친, "참으로 고귀한 마음이군요~~!"라고 칭찬해 줍니다.
알프레도父: 참으로 고귀한 마음이군요!
비올레타: 감사합니다.
알프레도父: 그 고귀한 마음으로 희생해 주시오.
비올레타:......
알프레도 부친의 길고 집요한 설득과 애원으로 결국 그녀는 사랑을 포기하기로 결심합니다. 아마도 그녀는 그런 행복한 생활이 영원히 지속될리 없다는 불안이 싹트는 가운데,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과의 관계 때문에 감당해야 할 사회적 질타를 걱정하여 부당한 희생을 받아들인 것 같습니다. 이런 스토리가 비극으로 치닫으려면 남자 주인공의 캐릭터는 반드시 유약하고 충동적이어야 하는데, 바로 알프레도가 그렇습니다. -_ - 앞뒤 안가리고 여자를 찬미하며 마음을 얻어내고, 여자 돈으로 아무 생각 없이 사랑의 도피 행각을 벌이다가, 갑작스레 떠나버린 여자에게 어떤 사연 정도는 있을 거라는 생각은 조금도 해보지 않고, 원망과 질투와 복수의 화신으로 변해 버립니다. 이런... 찌질...!
그래서인지, 마지막 장에서 알프레도와 알프레도 부친이 죽어가는 비올레타에게 용서를 구할 때, 그닥 마음에 와닿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단지 그녀의 가엾은 삶과 외로운 죽음만이 더욱 더 돋보여져, 죽어가는 그녀 옆에 누가 있다한들 그보다 더 고독할 수는 없을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들었습니다. 비올레타는 "아픔이 사라졌어! 다시 살아난 것 같아!"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숨을 거둡니다. 죽음에 이르러서야 고통과 슬픔을 씻어낸 것입니다.
극 속에서 비올레타는 죽음으로 구원을 얻었지만, 현실에서 죽음으로 구원을 얻는 건 너무 극단적입니다. 조금 더 서로를 이해해서 신분의 차이를 극복하고, 조금 더 당당하게 자신의 사랑을 지킬 수는 없는 걸까요? 정 이것저것 안되면 그냥 찌질이 남자에게 포스트잇에 굳바이라도 써붙여 이별을 통보하고 깨끗하게 떠나서 잘 먹고 잘 살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ㅅ-
<라 트라비아타>를 보고 연상되는 그림을 적어보라고 한다면, 다른 작품들에 비해 유독 그 길이가 길 것 같습니다. 아마도 그만큼 대중적인 스토리여서 우리가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이미지들이 좀 더 많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하지만 피치의 <라 트라비아타>는 첫 느낌이 원색 그 자체였습니다. 순수한 사랑이 피어나는 화이트, 슬픈 이별을 감수하는 블루, 질투로 얼룩진 레드, 구원과 죽음의 블랙, 그래서 아주 자연스럽게 교과서에서부터 친숙하게 보아온 몬드리안의 차가운 추상이 떠올랐습니다. ㅎㅎ
하지만 역시 <라 트라비아타>의 히로인인 비올레타를 설명하려면 몬드리안보다 좀 더 친숙한 그림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마네의 <발코니>에 등장하는 여인은 화류계 여성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비올레타의 순수함과 우울함에서 멀리 있지 않습니다. 그녀는 어두운 배경색으로 가려진 그녀의 '현실'과 빛이 들어오는 방향에 존재한 '세상' 그 어느 곳에도 제대로 속해있지 않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로 인해 그녀가 전체적으로 권태로워 보인다해도, 다소 고집스러운 페이스는 그녀의 내면엔 아직 열정이 꿈틀거리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마그리트의 그림은 조금 더 난해하긴 합니다만, 당연히 주변을 밝혀주어야 할 촛불이 오히려 그녀의 얼굴에 그림자를 드리우는 이 장면에서 저도 모르게 비올레타를 떠올렸습니다. 금발에 파란 눈, 붉은 입술의 그녀는 표정 없이 공허한 시선만을 우리에게 던지고 있습니다. 저 너머 하늘은 그렇게 맑을 수가 없는데, 불행히도 그녀와 하늘 사이에는 보라색 커튼이 드리워 있습니다. 아마 조금 있으면 커튼이 쳐지고 하늘을 완전히 가릴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런 그녀의 현실에도 백색의 구체만은 마치 정지된 시간 속에 있는 듯, 혹은 시작부터 거기에 자리하고 있었다는 듯 담담히 놓여져 있습니다.
그림 속 장치들을 하나하나 오페라의 내용과 꿰맞추는 것은 피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만, 결국 모든 작품에서 우리가 읽을 수 있는 것은 바로 그녀들의 자아와 세상 사이에 어떤 불합리한 장애물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관습일 수도 있고, 편견일 수도 있고, 부조리일 수도 있겠죠. 우리는 그것을 인정함과 동시에 넘어설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저렇게 매력적인 고집스런 표정과 순백이 구체가 존재하는 한, 우리는 계속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으며, 그런 식으로 이미 많이 전진해 왔다는 것을, 조금은 기쁘게 생각할 수도 있겠죠.
그나저나 피치 아저씨는 공연날 블랙 수트에 붉은색 머플러를 걸치고 등장하셨는데......
정말 귀여우셨어요....! 'ㅁ'
정말 귀여우셨어요....! 'ㅁ'
댓글을 달아 주세요
댓글을 보고 놀러왔습ㄴ다.
여백의 미를 잘 활용한 멋진 블로그네요. 평소 제가 닿을 수 없는 분야의 이야기들이 즐비한 것 같습니다.
그림 잘 그리시는 분은 정말로 대단한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마음을 그림으로 표현하는 기술은 아무나 갖을 수 없는 것이니까요...^^*
종종 놀러와서 교양도 쌓고 갈게요.
좋은 하루되세요.
모피우스님의 태국 여행기 기대됩니다. +_+
그나저나 따님도 너무 귀여워요. ㅎㅎ
영화에서도 멋진 그림을 찾아 주시더니,
오페라에서도.. ㅎㅎ
저도 자주 놀러와서 감각을 배우고 갈께요 ^-^
같이 공감하고 이야기 나누었으면 좋겠어요.
저도 smilehero님 블로그 넘 좋아요. ^^
우와~ 오페라도 보시고....
지적인 생활을 영유하고 계시네요~
하하;;;
어쩌다 보게 된 것 뿐이에요. ^^;;;;;
김학민,홍승찬 교수님의 오페라 강좌를 듣고 있어요~ 요즘 얼마전 이 유명한 라트라비아타 공연을 30%싸게
해주셔서 많이들 갔답니다. 전 아쉽게도 안갔어요. 보셨으면 알아뵙지 못하겠지만,만났었을수도 있겠네여~~^^
헉 30% 할인이라니
부러워요! +_+
딸뿡님 홈타고 넘어왔습니다. 꾸벅~
와, 이 오페라 보셨군요..부럽습니다. 제가 이거 보고 말거라고 포스팅 했었는데...흑흑, 결국은 실패했지만 여기 포스팅으로라도 대리만족을 하고 가야겠네요~^^
본건 아니지만, 그래도 저 포스터 사진보니 트랙백 걸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