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일러스러운 구석이 있으니 영화 내용을 미리 알고싶지 않다면 패스해주세요. ^^;
아래는 영화를 보던 날 퇴근 전에 렌지님과 메신져로 나눈 대화 내용입니다...'ㅁ'
2008-01-11 오후 3:32:50 [섬연라라] "인생을 포기하기는 쉽겠지만, 죽은 뒤 그것을 다시 시작할 수는 없다. 지금이 최악의 시기일지라도 언젠가 반드시 기회는 올 것이다. 그때까지는 무슨 짓을 하든 견뎌내야만 한다."
2008-01-11 오후 3:33:03 [렌지] 멋진 말이당
2008-01-11 오후 3:33:17 [섬연라라] 웅
2008-01-11 오후 3:33:28 [렌지] 마음속에 간직하면 좋을 말이다
위에 언급한 구절은 웹서핑을 하다가 발견한 문구인데, <검은 집>의 작가로 유명한 기시 유스케의 <유리 망치>라는 작품에 나오는 내용이라고 합니다. 그냥저냥 업무 시간 틈틈히(!!!) 서핑 중에 눈에 들어온 문구가 그날 저녁 보게될 영화의 대미를 장식할 황당 시츄에이션의 교훈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지요. -ㅅ-
그 최악의 시기라는 것을, <미스트>에서는 최강의 공포와 마주한 순간으로 설정합니다. 아마 안개와 괴생명체는 밑도끝도 없는 공포감을 조성하기에는 그야말로 안성맞춤이었겠지요. 먼저 아무것도 볼 수 없도록 짙은 안개를 쫘악 깔아주고, 안개 속에 정체를 숨기고 사람들을 낚아채다가, 토막난 피투성이 시체들에 경악할 때 즈음 하나 둘 씩 징그러운 괴물들을 보여주는 거죠. 하지만 마침내 괴생명체의 존재를 눈으로 확인했다하여 두려움이 줄어드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눈으로 보았음에도 그 실체에 무지하여 생기는 공포감은 우리를 더욱 더 강하게 조여옵니다.
도대체 저런 '있을 수 없는' 괴물은 어디서 어떻게 왜 나타난 걸까요? 극도의 패닉 상태에서 아수라장이 된 군중들은 일단 가장 기대기 쉬운 종교적 해석 속에서 공포에 대응합니다. 인류의 불안이 극도로 팽배해지는 세기말 무렵에 종말론이 대성하듯, 이 믿을 수 없는 현실 앞에서 사람들은 신의 분노와 인간의 원죄를 이야기하며 -심지어는 제물(祭物)론까지 주장하며- 태초의 문명, 기원전 성경으로 돌아가려 합니다.
이제 이성을 잃은 광신도들은 이런 참혹한 상황에 대해 탓할 누군가가 필요합니다. 군부대의 비호 속에 수상한 실험을 하던 과학자들 때문이라는 증언 한마디에 그 자리에 있던 젊은 군인은 영문도 모른 채 난도질 당해 개죽음을 당합니다. 칼부림 속에 피냄새가 진동하고 제물이 된 자의 처절한 비명이 울려퍼지는 와중에, 선동한 자, 공모한 자, 방관한 자 모두의 눈빛에선 일종의 안도감이 엿보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나약함을 타인과 공유하면서 비겁한 생존 본능을 정당화합니다. 일단 거기까지 진행되면 그 뒤에 따르는 잔인한 살인은 그저 하나의 의식이 될 뿐입니다.
영화는 시작부터 일관성 있게, 우리가 모르고 있는 것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주인공은 컴퓨터 그래픽이 대세인 시대에 수작업으로 영화 포스터를 그리길 고집하며 자신이 얼마나 뒤처질 수 있는지에 대해 불안을 표현합니다. 군부대의 비밀 프로젝트에 대한 괴소문은 외계인 실험 등과 연관된 엑스파일 적인 내용이고, 자신의 눈으로 보지 않은 것 혹은 전혀 배운 적 없는 것은 일말의 여지도 없이 부정해버리는 엘리트 법조인도 등장합니다. 무지하고 멍청하게 묘사되는 블루칼라 계급의 중년 남자는 시종일관 잘못된 판단으로 일을 그르칩니다. 결국, 과학자들이 다른 차원으로 통하는 문을 열어서 재앙이 일어났다는 설정은 우리의 무지가 우리가 모르는 것들로부터 얼마나 큰 공포를 이끌어낼 수 있는 지 말해줄 수 있는 다분히 위트 섞인 장치였던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가 모르는 것들로부터, 알 수 없는 존재의 위협으로부터 어떻게 자신을 보호할 수 있을까요? 영화는 그 마지막에서 황당함과 허탈함을 선사하며 관객으로 하여금 다시 한번 생각해 볼 기회를 만들어 줍니다. 영화 속에서 생존의 정답이 없었듯이, 우리가 생각해낼 수 있는 보호책도 가지각색이겠지요. 다만 저는 라스트씬에서 주인공의 절규를 들으며 그 날 오후의 글귀를 떠올릴 뿐이었습니다.
"인생을 포기하기는 쉽겠지만, 죽은 뒤 그것을 다시 시작할 수는 없다. 지금이 최악의 시기일지라도 언젠가 반드시 기회는 올 것이다. 그때까지는 무슨 짓을 하든 견뎌내야만 한다."
사실, 영화를 보신 분들이라면 공감하시겠지만, 영화 속 다양한 캐릭터들 가운데 유독 돋보이는 여인이 있었으니, 킹왕짜증 캐릭터 카모디 부인입니다. -_ - 어쩐지 우리나라 지하철이나 명동 거리에서 볼 법한, 예수천당 불신지옥을 목놓아 외치시는 그런 분이지요... /후우 심지어 카모디 아줌마 죽던 씬에선 사람들의 박수가 터져나왔을 정도니까요...;;; 종교는 분명 인간 문명의 산물이고,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알 수 있게 해주는 일종의 철학입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카모디 부인은 그야말로 우리가 진정 있는 힘껏 싸워야 하는 상대는 미지의 괴생명체가 아닌, 우리 내면의 괴물이라는 사실을 그 존재로서 설파하고 있는 거지요. 영화 초반엔 그저 정신이 좀 이상한 아줌마 같아서 사람들이 기피하는 정도였지만, 중반 즈음 공포감이 극에 달한 상황에서 그녀의 존재는 두드러지기 시작합니다. 그녀의 전도는 겁에 질린 사람들에게 꿀처럼 달콤한 유혹이 되어 힘을 발휘합니다. 하지만 카모디 부인이 그토록 맹신하는 종교는 그저 허울일 뿐, 그녀를 움직이는 것은 무지와 두려움, 이기심, 집착, 고독에 지나지 않습니다. 물론 그녀를 따르는 사람들도 마찬가지고요.
카톨릭 교회에서 가장 위대한 성자 중에 한명으로 꼽히는 성 안토니우스는 20년 동안 동굴에서 홀로 악마와 싸우며 온갖 유혹을 이겨내고 마침내 영적 순결을 얻게된 인물입니다. 성 안토니우스의 이야기는 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고 하지요. 그 묘사는 마틴 스콜세지 감독이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에서 그린 겟세마니 동산의 수난을 연상시키기도 합니다. 얼마 전에 읽은 <영혼의 리더십-마하트마 간디>에서도 느꼈던 거지만, 우리가 성인이라 일컫는 인물들은 끊임없이 자기 안의 악과 투쟁하며 살았던 것 같아요. 가끔은 그것이 지독한 결벽증이나 편집증으로 보이리만큼 금욕에 대한 강한 집착을 보이지요. 부인에 대한 욕망마저도 수치스러워했던 간디의 금욕주의는 분명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겐 더 이상 설득력이 없어 보입니다. 돈이나 섹스 등의 세속적인 욕망이 죄가 되지 않고, 소유하는 것이 덕이 되는 현실 속에서, 우리는 어떤 잣대로 우리 안의 선과 악을 구별해내야 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도대체 내 안에 있으나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는 그것과 어떻게 싸워서 이길 수 있을까요?
Max Ernst (1891-1976)
The Temptation of St Anthony. 1945.
Oil on canvas. 108 x 128 cm.
Wilhelm-Lehmbruck-Museum, Duisburg, Germany.
The Temptation of St Anthony. 1945.
Oil on canvas. 108 x 128 cm.
Wilhelm-Lehmbruck-Museum, Duisburg, Germany.
초현실주의 화가 막스 에른스트의 <성 안토니의 유혹>은 이 가톨릭 성자의 투쟁을 묘사한 작품들 중에서 가장 창의적으로 못생긴 악마들을 그려낸 작품이 아닐까 싶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원본을 좀 더 자세히 뜯어보고 싶은데 말이죠. /흑 주황색, 녹색, 황색이 교묘히 어우러져 기괴한 느낌을 주는 배경, 저 멀리 이미 제물이 되어 나무처럼 굳어버린듯한 시체, 눈, 코, 입, 사타구니까지 기어들어오는 소름 끼치는 괴물들...... 아마도 성 안토니우스에게 닥친 유혹은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은 지옥의 공포 속에서 한 여름의 산들바람처럼, 한 겨울의 훈풍처럼 부드럽고 달콤하게 다가온 악마의 속삭임이었을 겁니다. 살아가면서 수없이 듣게될 속삭임들이 악마의 유혹인지 신의 음성인지, 엄청난 실수인지 올바른 결정인지, 어떻게 알 수 있는 걸까요? 이렇게 끊임 없이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며, 갈등을 하고, 선택을 하고, 그 길을 걸으며, 최후의 순간까지 희망을 버리지 않는 것이 우리의 최선인 동시에 숙명인 걸까요......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그 싸움 속에서 스스로도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우리가 괴물의 심연을 오래동안 들여다 본다면, 그 심연 또한 우리를 들여다 보게 될 것이다." - 니체
